연못 pond 어렸을 적, 나는 우리 집 정원에 있는 연못에서 즐겨 놀았다. 투명한 물길 아래 비칠 듯 말 듯 흘러가며 노니는 물고기를 들여다보며 하늘과 땅의 평화를 만끽했다. 지금은 사라진 그 연못을 내 마음속에 그려본다. 다산초당 Dasan's Wild Home 다산(茶山)의 옛거처를 찾아 오르는 길은 참으로 운치있다. 고불고불한 산속 오솔길을 나무들의 그늘을 안고 오르며 숲냄새와 숲빛깔에 젖어 나처럼 이 길을 올랐을 다산을 떠올렸다. 봄 Spring 작년 늦봄, 전라도의 한마을을 봄바람을 타고 이리 저리 돌아다녔다. 쪽빛 같은 하늘에서 뿌려주는 따사로운 햇살언덕 넘어 고개 쪽에서 불어오는 투명한 바람.황토를 밟으며황토에 뿌리내린 풀과 나무와 함께 흔들리다. 동쪽 언덕 아래 밭 구덩이에서 습기 찬 황토 한줌을 얻었다. 물로 여러 번 일구어 곱디 고운 알갱이만 모았다.콩즙에 섞어서 장지 위에 발랐다.시골길 황토담과 이끼,그 아래 피어난 자그마한 풀 한 포기, 이슬그들의 속삭임, 투명한 색감, 질감... 현(玄) cosmos 옛사람들이 갖고있는 우주에 대한 관심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실생활과는 격리된 탁상논리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그 비현실성에 매력을 느끼고 오히려 그러한 것에서 삶의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이는 것에 대한 관심은 지대한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해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석(石) stone 얼마전 서구의 어떤 생물학자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돌이 지닌 생명력과 인간의 그것은 일치한다고..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사물이 지닌 생명력과 그 원리를 분석하여 도달한 그의 결론은 이미 사물에 대한 순수한 직관력을 지닌 과거 동양인의 의식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그들과 같이 내 앞에 놓여있는 대상에 대하여 가까이 다가가서 마음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그것들이 외부를 향하여 발하고 있는 그 주파수에 나의 정서를 맞추고 싶은 것이다. 전통적인 동양산수는 산과 물, 나무 등 자연 경물을 빌어서 내재된 음과 양의 기운을 표현하려 애를 썼다. 결국 실존하는 대상인 산과 물의 형상을 통해서 그것을 움직이는 힘의 원리를 표현하려 한 것이다. 묵의 농담이라든가 필의 강약이라든가 하는 것도 이러한 원리를 정확히 표현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석’이란 작업에서는 그러한 ‘산’과 ‘수’를 반복, 확대되지 않은 형태로, 단일화시켜 ‘돌’과 ‘물’의 일차적인 상태로 환원시켜 버렸다. 돌이나 물이 갖는 정서는 나를 몹시 편안하게 한다. 현(玄) The black 이 작품은 현에 대한 시어적인 표현이다. 달밤 고요한 정적 중에 하늘을 그대로 비춰낸 산 속 계곡 물의 명징함을 표현하였다. 나는 가끔 불투명한 도시 생활 중에서도 인적 없는 계곡의 투명한 깊이를 그리워하며 그곳으로 달려가고픈 열망에 사로잡힌다. 하늘을 담은 물, 하늘보다 높이 오른 산 내 흉중의 산수라 할 수 있을까 매(梅) The maehwa blossom 사군자는 전통적인 작업의 수련으로서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하지만 이미 정형화되어 버린 의미 없는 형식의 반복은 어쩐지 나에게는 박제와 같은 느낌을 주곤 한다. 장지와 콩즙에 담긴 매화는 이전의 문인화풍의 매화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풍경(風景) landscape 우리 조상들은 특이나 종이의 정서를 즐겼던 것 같다. 민예에서 나타나는 종이기법은 매우 다양하다. 종이 오리기부터 찢기, 붙이기, 붙여서 요철 만들기, 종이 부처, 종이 술병 등 입체작품까지 아주 다양한 종이작업을 하였으며 이러한 작업형태는 장지가 지닌 질기고 견고한 성격을 증폭시켜주는 쪽으로 발전하였다. 나는 그들이 장지를 만지면서 느꼈을 그 즐거움에 다가가고 싶었다. 전통회화의 다양화, 현대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이 장지의 물성을 확대하고 깊이를 주고 싶은 것이다. 목(木) wood 와싱톤주의 레이니에 산에서 1000년이 넘은 체다 나무의 단면을 보고선 나무가 지닌 의미를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이 세상을 지켜 봐 왔을 그 나무에게서 일종의 경외감과 신비로움을 느꼈다. 또 그 나무에 배어 있는 우리와 비슷한 세계관을 지닌 인디안의 우주관은 몹시 인상적이었다. 나무가 지닌 에센스, 영(靈)적인 힘은 나로 하여금 일상을 넘어선 세계로 나를 유도한다. 나무와의 만남은 어쩌면 나의 지금의 삶 이전에도 있었고 또 이후에도 가능할까? 곡(谷) valley 종이라는 질료만으로도 전통적 도구를 대신하는 역할부여가 가능하리라 본다. 닥섬유를 수제로 직접 떠내고 회화의 평면성보다는 부조적인 질감에 산수의 이념을 심어 보고자하였다. 산(山) mountain 건국초기의 한국인의 사고는 어떠했을까 단군으로부터 시작되어 삼국이 유지되던 그 시절을 느껴 볼 수는 있는지.. 박물관에서 만난 백제의 기왓장인 이 산경문전은 나의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언뜻 보기에 단순한 문양과 같은 구조를 지닌 이 기왓장을 모사하면서 그들의 공간에 대한 의식구조가 간단치 않고 공간감이 평면적이면서도 상당히 구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중세나 근세에 이르러서의 조상들의 의식구조보다도 그 이전 지점에서 이러한 시원적인 미감을 더욱 더 느껴볼 수 있으며 현대를 위한 과제의 모색도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해 보려고 한다. 생(生) life 장지에 기름을 올리고 장기간 건조를 시킨 후 그것을 접었다 폈다하면서 종이의 자연스런 성질에 따라 주름이 지고 꺽여져서 부스러져 나온 조각을 다시 종이 위에 붙이고 요철을 올린 다음 도토리껍질로 염색을 올린 후에 콩즙을 다시 발랐다. 장지는 어떤 종이보다 염료에 친숙하고 그 색을 아주 잘 받아 낸다. 접착제를 써서 부착시킨 상태가 아니라 종이의 셀룰로즈에 잘 스며들어 결합된 염료는 안료보다 훨씬 깊이 있고 맑은 색감을 전해준다. 아직 안료가 보편적이지 못하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안료보다 염료에더욱 친숙했을 터이고 염색의 고아한 숨결을 몹시 사랑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지켜보았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의 분위기에서 나는 우리의 퇴색한 삶을 느낀다. 내 삶의 질감을 만져 본다.